안녕하세요, 비즈니스 혁신 파트너 BSG입니다.
SAP를 쓰는 회사에는 독특한 언어가 있습니다.
"그건 VA01에서 치세요."
"ME21N 열어보셨어요?"
"FB50으로 전표 넣으면 돼요."
처음 듣는 사람에겐 암호 같지만, SAP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일상 대화입니다.
오늘은 이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이 어디서 왔고, 왜 30년 동안 살아남았고, 지금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SAP의 대표 제품 R/3가 나온 건 1990년대 초입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고, 마우스보다 키보드가 빠르던 시절이죠.
SAP에는 수천 개의 업무 화면이 있었습니다.
메뉴로 찾아가려면 폴더를 다섯 번, 여섯 번 열어야 했죠. 그래서 각 화면에 짧은 코드를 붙였습니다.
입력창에 코드를 치면 곧바로 그 화면으로 점프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트랜잭션 코드(T-code)입니다.
규칙성도 있습니다.
앞의 두 글자는 대체로 업무 영역을 뜻합니다.
VA는 영업, ME는 구매, MM은 자재, FB는 재무회계처럼요.
뒤의 숫자는 동작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01은 생성, 02는 변경, 03은 조회입니다.
그래서 VA01로 판매 오더를 만들고, VA02로 고치고, VA03으로 조회합니다.
알고 나면 꽤 체계적이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낡은 방식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현장에서 쓰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빠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판매 오더를 백 건 넣는 사람에게, 메뉴를 클릭해 들어가는 것과 코드 네 글자를 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숙련된 사용자에게 T-code는 불편한 유물이 아니라 단축키입니다.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판매 오더 만드는 화면"은 사람마다 다르게 부를 수 있지만, VA01은 전 세계 어느 SAP에서나 같은 화면입니다.
매뉴얼을 쓰든 원격으로 안내하든 오해가 없습니다.
공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담당자와 베트남 법인 담당자가 언어는 안 통해도 "VA01"이라고 하면 통합니다.
SAP 사용자들 사이의 국제 공용어인 셈이죠.
문제는 새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입사 첫 주에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건 ME21N에서 하시고, 승인은 ME29N이요. 조회는 ME23N."
메모장에 받아 적고 외웁니다.
그러다 6개월쯤 지나면 자연스럽게 쓰게 되죠.
하지만 그 6개월 동안 "SAP는 어렵다"는 인상이 굳어집니다.
실제로 SAP를 쓰는 기업에서 자주 나오는 불만이 이것입니다.
시스템이 나쁜 게 아니라, 처음 배우는 비용이 크다는 것.
업무를 아는 사람이 시스템 때문에 헤매는 상황이 생깁니다.
SAP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Fiori입니다.
S/4HANA로 오면서 사용자 화면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코드를 외워 화면을 찾는 대신, 업무 역할에 맞는 타일이 배치된 화면에서 필요한 앱을 고르는 방식이죠.
스마트폰 홈 화면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구매 담당자에게는 구매 관련 앱이, 재무 담당자에게는 재무 앱이 보입니다.
자기 업무와 상관없는 수천 개의 화면을 헤맬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모바일에서도 쓸 수 있고요.
다만 현실은 조금 복잡합니다.
기존 사용자들은 여전히 익숙한 T-code를 선호하고, 오래된 커스텀 화면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업이 두 방식이 공존하는 상태로 운영합니다.
그리고 지금, 더 큰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다룬 Joule 이야기입니다.
화면을 찾아가는 대신, 그냥 물어보는 방식이죠.
"지난달 납기 지연된 공급사 알려줘."
"5만 달러 넘는 미결 발주서 보여줘."
코드도, 메뉴도, 타일도 필요 없습니다. 업무 언어로 말하면 됩니다. 나아가 조회를 넘어 실제 처리까지 맡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요.
30년의 궤적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코드를 외우던 시대 → 앱을 고르던 시대 → 말로 시키는 시대.
당장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AI에게 "판매 오더 만들어줘"라고 말하려면, 결국 판매 오더가 무엇이고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화면을 찾는 수고는 줄어도, 업무를 이해하는 일은 그대로 남습니다.
오히려 그 비중이 커집니다.
코드를 외우는 데 쓰던 시간을,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쓰게 되는 것이죠.
지난 글에서 다룬 ABAP 개발자 이야기와 같은 구조입니다.
도구가 편해질수록, 도구를 다루는 능력보다 일을 아는 능력이 중요해집니다.
VA01이라는 네 글자에는 SAP의 30년이 담겨 있습니다.
키보드가 빠르던 시절의 설계가, 앱의 시대를 지나, 이제 대화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신입 사원에게 T-code 목록을 건네고 계신다면, 한번 생각해보셔도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 사용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SAP를 쓰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여전히 최선인지 말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이 그 시스템을 어떻게 쓰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출처 : SAP 제품 및 사용자 인터페이스 변천에 대한 일반 정보
기획 : 도예원